‘신이시여, 벤허에게 어찌 이리 가혹하십니까.’
[나인스타즈=위수정 기자] 1880년 루 월러스(Lew Wallace)의 소설 ‘벤허’는 베스트셀러에 등극해 그 이후에 1907년 무성영화로 나와 여러 차례 리메이크와 8번의 재개봉을 기록하고 있는 작품이다. 시대의 명작이라고 불리는 ‘벤허’를 뮤지컬로 보면 어떨까.
뮤지컬을 보러 가기 전에 3시간 42분이라는 러닝타임을 기록하는 1959년 개봉한 영화 ‘벤허’를 보았다. 영화를 보면서 ‘과연 저 영화가 1959년에 만들어진 게 맞나?’ 의문이 들 정도로 로마와 예루살렘, 해상 전투, 전차 경주 장면이 시선을 사로잡았다. 특히나 전차 경주 씬은 이 장면만 제작비가 100만 달러가 들고, 기획만 1년을 한 장면으로 십여 분간 손에 땀을 쥐며 보았다.
굉장히 방대한 서사가 나오는 이 영화가 뮤지컬 무대에 올라가면 과연 어떻게 변할까, 몇십 년이 흘러도 여전히 명작이라고 칭송받는 작품이 혹시나 무대 위에 다 담기지 않는 것은 아닌지 약간의 우려를 하며 공연장으로 향했다.
⚫ ‘벤허’의 줄거리
서기 26년, 나라를 잃고 로마의 박해에 신음하는 예루살렘. 명망 높은 유대의 귀족 벤허는 로마 장교가 되어 돌아온 친구 메셀라와 오랜만에 재회하고, 메셀라는 벤허에게 유대의 폭도 소탕을 도와 달라 부탁하지만 벤허는 거절한다.
다음 날, 벤허의 여동생 티르자는 집 옥상에서 그라투스 총독의 행군을 구경하던 중 기왓장을 떨어뜨리는 사고를 낸다. 메셀라는 이를 문제 삼아 벤허 가문 전체에 반역죄를 씌우고, 억울한 누명을 쓴 벤허는 로마 군함의 노를 젓는 노예가 된다.
3년 후, 벤허가 탄 군함이 해적과의 전투 중 난파되고, 사령관 퀸터스의 목숨을 구한 벤허는 자유의 신분을 얻어 퀸터스의 양자가 되어 로마의 귀족이 된다. 생사의 위기를 극복한 벤허는 자신의 모든 것을 앗아간 메셀라에게 복수할 것을 결심하는데…
⚫ 초연과 달라진 ‘벤허’
2017년 초연 후 2년 만에 재연으로 돌아온 뮤지컬 ‘벤허’는 14곡의 넘버를 추가하고, 초연보다 대사를 줄여 장면들이 좀 더 유려하게 이어질 수 있게 주력했다. 이번에 추가된 넘버로 ‘살아야 해’는 벤허가 메셀라와의 대결을 앞두고 가족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깊은 슬픔과 절망감에 빠져 복수를 다짐하는 곡으로 벤허의 감정을 절절히 보여준다.
‘제2회 한국 뮤지컬 어워즈’에서 11개 부문 후보에 올라 대상, 앙상블상, 무대예술상을 수상하고, 뮤지컬 ‘프랑켄슈타인’의 흥행을 이끈 왕용범 연출과 이성준 작곡가가 만든 뮤지컬 ‘벤허’의 재연 공연은 더욱 더 화려하고 웅장한 무대로 관객의 시선을 끌 수밖에 없다. 초연과 달라진 점으로 캐스팅의 변화도 있다. 초연에서 벤허를 배신하는 메셀라 역할을 맡았던 민우혁은 이번 시즌에는 벤허로 나오며 색다른 도전을 시작한다.
⚫ 하이라이트 ‘전차 경주’
뮤지컬에서 ‘벤허’의 주요 장면은 단연 전차 경주 장면을 꼽겠다. 영화에서도 최고의 장면으로 꼽히는 전차 경주 장면에는 관객들의 시선을 끄는 마차와 말의 조형물이 등장한다. 회전무대가 돌면서 벤허와 메셀라의 박진감 넘치는 대결 장면을 연출하며 마치 콜로세움에서 경기를 지켜보는 느낌이 든다.
⚫ ‘벤허’와 ‘메셀라’
벤허와 메셀라는 어렸을 때부터 형제처럼 자란 친구이지만 벤허는 유대 귀족의 자제이고, 메셀라는 부모가 죽고 벤허의 부친이 거둬서 키우던 로마인이다. 벤허와 메셀라는 친한 친구이지만 로마인과 유대인, 귀족 가문이자 집에 얹혀사는 아이이다. 메셀라가 벤허의 집에서 받았던 차별로는 넘버 ‘나 메셀라’에서 “지지리도 가난한 하급 병사의 아들로 태어났지 / 아버진 전쟁에서 어머닌 전염병으로 죽어갔네 / 난 이방의 유대인에 입양되었지 / 그들은 날 동정했어 / 날 형제라 불렀지만 더 맛있는 빵은 그들의 아들과 딸에게 주었네 / 열심히 착한 척 열심히 이쁜 척 그들의 환심을 샀지 / 하지만 내 손엔 반 토막 난 빵만을 줬어 / 먹다 남은 동정”을 보면 알 수 있다. 겉으로 보면 형제 같은 친구 사이지만 메셀라의 마음속에선 슬픔과 자격지심, 열등감, 짓눌린 자존심을 눈치챌 수 있다.
뮤지컬 팬들의 반응을 보면 “먹을 거 가지고 치사하게 군다”, “벤허 가족은 몰랐을 거다. 귀족 지위면 식사는 시종이 챙겨주니, 아마 시종이 차별했을 거다”, “내 자식이랑 똑같이 키우기 힘들지 않았을까?”라는 의견이 있는데, 유대인 귀족 가문과 그 집에 얹혀 지내는 고아 로마인이라고 생각하면 서로의 마음이 이해되지 않을까.
벤허와 메셀라의 갈등은 계속되고, 결국엔 전차 결투 장면에서 최고에 이른다. 메셀라 때문에 모진 역경을 거치고 가족의 생사도 정확히 알지 못했던 벤허는 전차 결투에서 승리하고, 메셀라는 벤허의 앞에서 칼로 자기 자신을 겨누며 죽음을 맞이한다. 더 이상 친구라고 하기도 싫은 메셀라에게 복수를 결심했는데 자기 앞에서 스스로 죽어버리면 얼마나 허무할까. 나의 열등감의 근원이던 벤허와의 대결에서 패배하여 자신의 배에 칼을 집어넣는 메셀라의 마지막을 어떻게 설명할까.
⚫ 가여운 ‘벤허’
극을 보는 내내 신이 벤허를 계속 시험에 들게 한다고 생각했다. 억울한 누명을 써서 노예로 살아가는 것도 모자라서, 가족의 생사도 모르게 만들고 소중한 가족조차 문둥병에 걸려서 벤허에게 모습을 보여주지 않으려고 한다. 벤허의 눈물이 강을 이뤄 흐를 정도로 계속되는 시련 속에서 예수는 벤허의 귀에 대고 말한다. “용서하라.” 최고의 복수는 용서라는 말이 있던데 그런 의미에서 한 말일까. 신은 정말 가혹하다.
⚫ 로마인과 유대인 그리고 한국인
뮤지컬 ‘벤허’를 보면서 우리나라의 슬픈 역사가 자꾸 겹쳐 보인다. 로마제국의 지배를 받던 유대인들의 아픔은 일제 강점기를 겪은 우리나라가 떠올라 마음이 아프다. 정말 다행인 건 우리나라도 유대인들처럼 일제에 굴복하지 않고, 대한독립을 위해 열심히 싸우고 나아갔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나에게 어릴 적부터 친하게 지낸 메셀라 같은 일본인 친구가 있다고 생각하면 나는 어떻게 할까. 아니다, 생각하지 않겠다. 우리나라에 대입하니 이야기가 달라진다.
⚫ 갓상블, 갓튼콜
종교적인 이야기가 있는 작품이여서 그런가. 뮤지컬 ‘벤허’에서 유독 갓(GOD)을 사용한 이야기가 많은데 ‘갓상블(앙상블)’, ‘갓튼콜(커튼콜)’이 있다. 뮤지컬 ‘벤허’의 앙상블은 총 26명으로 매 장면 장면마다 절도 있는 연기로 무대를 장악한다. ‘제2회 한국 뮤지컬 어워즈’에서 앙상블상을 수상한 이력만큼 배우들뿐만 아니라 앙상블 배우들의 연기를 지켜보는 것이 백미이다.
무대의 막이 내리는 커튼콜에 ‘벤허’ 배우들의 또 다른 앵콜 공연이 시작한다. 극 중에 보여줬던 넘버를 다시 들려주며 뮤지컬 공연의 감동을 집에 가는 순간까지 이어갈 수 있다.
귀족 가문의 자제에서 하루아침에 노예가 되는 기구한 삶을 살게 되는 벤허 역에는 카이, 한지상, 민우혁, 박은태, 벤허를 배신하는 친구 메셀라 역에는 문종원, 박민성과 벤허의 옆을 지켜주는 에스더 역의 김지우, 린아가 연기한다.
한편, 뮤지컬 ‘벤허’는 블루스퀘어 인터파크홀에서 현재 진행 중이고, 10월 13일까지 공연된다.